[이태상 칼럼] 삶의 축제

이태상

요즘 미국 청소년들의 유행어가 ‘제기랄 난 아무것도 (할) 수조차, (알) 수조차, (상상할) 수조차 없네’란 뜻으로 ‘I can't even. I'm unable to even. I have lost my ability to even. I am so unable to even. Oh, my God. Oh, my God!’이라고 ‘조차’란 단어를 반복 사용할 뿐만 아니라 이 단어로 말을 마치고 문장을 끊어 버린다는 다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전적으로 자신감이 결여된 회의와 냉소와 혼란과 당혹감의 발로인 것 같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표류하면서 너무 쉽사리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한다. 이는 오늘날의 젊은이 아니 어린이들이 부모의 과잉보호로 심약한 약골들이 되어 쉽게 겁먹고 쉽게 상처 입고 쉽게 무기력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최근 한국에서 있었던 '잔혹 동시' 논란에서 표출되었듯이 정신적인 폭력으로 발산하게 되는가 보다. 

 

또는 최근의 ‘천재 소녀 명문대학 허위 입학소동’에서처럼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욕심을 견디다 못해 하버드대와 스탠포드대에 동시 입학했다고 자기최면이라도 걸게 되나 보다. 중앙일보 기획 기사 ‘미녀와 야수’에서 정여울 문학평론가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어떤 방어기제는 파괴와 자멸을 초래하고, 어떤 방어기제는 구원과 기적을 가져온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상처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부정하고 퇴행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당장은 편하고 빠른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또 받아들이고 표현하고 승화하는 것이 힘들고 느리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이 된다. 오랜 금언인 ‘정직이 최선의 전략이다’라는 문장에서 나는 전략을 치유로 고쳐 보고 싶다. 솔직함은 처세술이나 성공 전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배려로서 더욱 소중한 치유의 기술이니까. 고백하지 못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처럼, 표현하지 못한 고통은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다.”

 

아, 그렇다면야 일단 주사위부터 던져 볼 일 아니랴. 어차피 모든 것이 미지수인 마당에 매사가 하기 나름이고, 삶 자체도 살기 나름 아니던가. 심고 가꿔야 거두게 되고, 하늘을 봐야 별을 따게 된다고, 숨을 내쉬어야 또 들이마실 수 있다. 그러니 세상에 공짜란 있을 수 없지. 이 사실 아니 진실을 깨우치는 순간부터 삶다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리. 이 점을 주지시키는 것이 교육의 전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고 학교 교육이라는 것이 단지 학위다 졸업장이다 취직을 위한 스펙 쌓기나 수지타산, 계산계정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야말로 인간로봇을 생산하는 공장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삶을 살아본다는 것은 아무 누구와 경쟁하는 것도, 남에게 내가 얼마나 성공하고 잘 사는지를 자랑하는 것도,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남기는가도 아니고 내가 얼마만큼 삶을 살아보는가가 아닐까. 

 

다시 말해 삶을 얼마만큼 사랑해 보는가이다. 숨 쉬는 것부터, 눈 뜨고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 온갖 경이로운 소리를 들어보는 것,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는 것, 섹스를 즐겨보는 것, 연애를 하고 실연도 당해보는 것, 결혼도 하고 또 하게 되면 이혼도 해보는 것, 이런 일도 저런 일도 다 해보는 것, 어떤 일을 도모했다가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해보는 것, 내 자식 남의 자식 가리지 않고 키워 본다는 것, 젊어 보기도 하고 늙어 보기도 한다는 것, 눈을 감고 잠을 자면서도 꿈까지 꾸어본다는 것, 그리고 살다가 죽어 본다는 것, 이 모두가 다 얼마나 기적 같은 일들이고 더할 수 없는 축복인가. 이 외에 우리가 뭘 더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체코 태생으로 프랑스 파리에 거주해온 작가 밀란 쿤데라가 한 인터뷰에서 말했던가. ‘유머 센스가 있는 사람은 믿을 만하다’고 그의 최신작 중편소설 제목도 반어법의 극치라 할 수 있는 ‘무의미한 축제’다. 축제란 영원하지 않고 잠시 지속될 뿐이라면 다양한 놀이를 우리 각자 식성대로 취향대로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만큼 해 보기다. 

 

백인백색이라고 음식도 다 한 가지 맛일 수 없고 무지개도 단 한 가지 빛깔일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우리 각자가 좋아하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맛보는 만큼, 꿈꾸는 만큼, 살아보는 것이 각자의 삶이 되리라. 축제의 존재 이유가 즐기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안토니오 포르키아가 했다는 말을 우리 한번 심사묵고해 보자.

 

‘내가 네게 뭘 주었는지 알지만 네가 무얼 받았는지 난 모르겠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 

 

작성 2026.10.17 10:28 수정 2026.10.17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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